이번 글은 김동건의 <현대신학의 흐름>을 통해 알게 된 불트만입니다.
1884년 우리나라는 갑신정변이 일어날때.. 불트만이 태어납니다.
태어나고 보니 집안은 온통 목사, 목사, 목사였더랬죠.
그래서 불트만은 목회자 가문의 분위기에 자연스레 휩쓸려(?) 목회의 길을 갑니다.
이 분은 딱히 대외활동이 많지 않았고 학교에서 강의하고 책 쓰고
줄곧 마르부르크(Marburg)라는 도시의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교편잡으시고
은퇴한 뒤에도 그 동네에서 사시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상아탑에만 머물던 분은 아니셨고 1930년에는 나치정권에 반대하는
고백교회에도 소속하셨고 그 유명한 '바르멘 신학선언'에도 동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1976년에 죽기전까지 왕성한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였고 많은 제자들도 길러냅니다.
불트만은 신약학자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경전(經典)이라는 기록된 텍스트가 있는 종교이기에
이 기록된 문서를 어떻게 바르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해석학'의 문제가 아주 큰 화두였죠.
불트만 역시 신약학자로서 이 해석학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뭐.. 상당히 잘 해냈죠. 그래서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있는거지만^
해석에 대한 불트만의 입장은 좀 뒤에서 보도록 하고 지금은 먼저 다뤄야 할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죠.
1. 역사적 예수 연구
역사적 예수 연구.. 다들 아시죠?
성서에 나오는 예수는 도대체 누구이며 진짜 예수는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탐구는
지금까지도 끊기지 않는데요, 이 연구는 유서가 깊습니다.
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크게 세 단계인 Old Quest - New Quest- Third Quest 로 나눕니다.
첫단계인 Old Quest 시기는 대략 1750년~ 1900년으로 이 때는 주로 예수의 생애를 연구하는데 집중합니다.
많은 스타 신학자들이 나옵니다만 이 1단계는 슈바이처와 켈러가 일단락시킵니다.
슈바이처는 같은 자료에서도 연구자에 의해 다양한 예수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지적하면서
복음서가 예수의 생을 이해하기에 적절한 자료인지 의문을 제기했고, 켈러는 실증적 역사와
실존적 역사를 구별하면서, 역사적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고신앙이 생기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 불트만이 <공관복음서 전승사>를 출판합니다.
불트만은 이 책에서 치밀한 방법론과 이론으로 예수의 말씀을 양식(form)에 따라 엄격하게 검증한 결과
성서자료는 예수의 생애 연구에 있어 역사적 자료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즉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역사적 예수' 탐구를 그냥 종결시켜 버립니다.
이제는 불트만을 넘어선 논리를 갖춘 '역사적 예수'가 나와야 했습니다.
이렇게 불트만은 1단계인 옛 연구를 종식시키고 2단계인 새탐구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2단계부터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연구 대신에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연구 초점을 옮깁니다.
역사적 예수의 새탐구(New Quest)는 1953년 케제만(Kasemann)이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하면서
시작되었고 불트만 학파라 불리는 사람들이 주축이 됩니다.
새탐구가 가능했던 이유는 1950년~ 1960년대 들어 사해문서가 발견되고 도마복음이 재평가 받는 등 역사적 예수 탐구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예수의 3단계(Third Quest)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운동으로 예수를 그의 말씀과 행위 전체를 조명하고 유대교적 배경안에서 이해하려는 움직임입니다. Funk와 Crossan 등 예수세미나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딱히 새로운 게 없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같은 주제를 다루지 않은 점때문에 비판받기도 합니다.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 연구 파훼법은 그랬다 치고.. 그는 예수를 어떻게 봤을까요.
그 치밀한 양식비평의 칼날로 성서를 파헤쳐서 찾은 예수는 여전히 '믿을만한' 분이었던가요?
그랬답니다.
불트만의 양식(form) 비평에는 두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의 사역과 복음서의 기록 사이에는 일정한 기간이 존재한다.
둘째, 전승이 구전되는 동안 예수에 대한 기록을 담은 unit들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나름의 '양식'들을 취한다.
이 전제를 바탕으로 예수의 말씀을 보면 그 말씀은 양식에 따라 '경구'와 '주의 말'로 분류되며
경구는 '논쟁대화', '사제대화', '전기 경구'
주의 말은 'I-saying', '비유'를 포함합니다.
각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논쟁 대화' 하나만 봅시다.
'논쟁 대화'는 시작할 때 어떤 행위가 포함되는데 이는 어떠한 행동이나 행위가 포함되지 않는 '사제 대화'와는 다릅니다.
또한 모든 논쟁 대화는 '상상적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에 초기 공동체가
자신의 관심에 따라 추가해 덧붙인 상징적 표현으로 역사성을 띤 건 아니지만 공동체의 삶의 정황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진정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고요.
아무튼 이러한 분석을 통해 불트만은 공관복음서에 대해 평가하길:
예수의 삶을 그려내기는 불완전하지만 예수의 메시지를 그려내기엔 충분하다고 봅니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메시지와 의미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 역사적 예수와 인간의 결단
불트만은 자신의 저서인 <공관복음 전승사>, <예수>, <동시대 상황 속의 원시 기독교>, <양식사 비평>, <신약성서 신학> 등에서
역사비평적 연구를 근거로 예수의 말과 행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교인'이며, 예언자나 랍비로 살았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 율법, 인간에 대한 해석은 유대 랍비와 달랐으며
일반적인 랍비와 다르게 죄인들, 창녀들, 세리들과 교제했습니다. 따르는 무리중에 여성이 있었고..
그렇다면 예수 자신은 '메시아적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메시아라는 말이 유대 종말론의 국가주의적 왕이라는 뜻이라면 대답은 No이고
메시아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선재를 뜻한다 해도 대답은 No이나
메시아라는 말이 구원-전달자로서의 사명이라면 대답은 yes일거 같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마지막 결정적일 때에 보내졌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선포와 말씀이 구원의 징조임을 알았으며,
자신의 선포를 통해 구원과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했었습니다.
그럼 불트만은 예수의 메시지를 어떻게 다루었나요?
불트만은 예수의 메시지를 '종말론적인 범주' 즉 예언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과
'윤리적 말씀의 범주' 즉 랍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키워드는 2개이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이고 국가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이 죽어서 가는 장소도 아닙니다.
세상이 종말할 때 오는 묵시론적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세상적인 것을 끝내는 종말론적인 구원으로 이는 인간의 결단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현재와 미래가 뒤섞여 있는데 불트만은 이를 '실존적인 현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순전히 미래적이지만 지금 인간에게 결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죠.
예수는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가 선포한 윤리적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순종을 요청하고, 이에 인간은 자신과 마주하면서 결단을 요청받습니다.
학계에서는 예수안에서 종말론적 말씀과 윤리적인 말씀처럼 상반되는 것이 함께 발견되는 것을 당황스레 여기지만
그 안에는 내적인 연결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말씀들 모두 인간을 하나님 앞으로 몰아가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여기서 인간이 '결단'한다고 했는데 인간에게는 그러한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이 도대체 있나요?
불트만에게 있어 죄, 은혜, 신앙은 인간의 '결단 그리고 '순종' 안에서 얽혀 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지만 그가 결단을 통해 케리그마와 만나지 않는다면 케리그마는 단지 종교적인 말일 뿐입니다.
'결단'과 하나님의 '은혜'는 동전의 양면이에요. 같은 사건의 다른 측면입니다.
결단하는 것이 은혜요, 은혜가 임할때 결단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불트만에게서 인간의 결단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로 읽혀야 할 거 같습니다.
운명과 자유가 얽혀있는 것처럼..
3. 비신화화
지금 시대에 성경을 읽으라고 일반인들에게 주면 씨알도 안 먹히죠.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믿어야 보인다?
이제 현대인의 상황 속에서 성서의 '계시'는 더 이상 진지하게 취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국인데도 기독교 내부에선 성경을 몇회독 했니, 성경공부모임을 하니마니 하면서
내부 단속을 하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안됩니다. 그저 게토화 될 뿐입니다.
성서가 성서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불트만은 성서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방법론이 바로 '비신화화'입니다.
불트만이 보기에 신약의 세계관은 '신화론적'입니다.
세계를 하늘- 땅 - 지옥이라는 삼층천적 구조로 보는데 이는 그리스 시대 모든 종교들이 공유한 세계관이었습니다.
당시의 별 숭배, 신비 종교, 영지주의, 유대 묵시적 신화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였습니다.
불트만은 신화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신화는 초월적 실체를 만져지고 보여지는 이 세상 것으로 객관화시키고이 세상의 기원과 목적을 이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을 넘어서는 곳에서 찾습니다.신화의 목적은 자신이 사는 이 세상 안에서 자신에 대한 자기-인식의 표현이기에그걸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듯이 과학에 의해 사고가 형성된 현대인에게 있어 신약의 신화적 세계관은 수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약을 신앙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건 '지성의 희생'을 가져올 뿐입니다.
그래서 불트만은 비신화화를 주장하는 겁니다.
다만 비신화화란 성서의 신화론적 세계관을 과학적 세계관이나 합리적 세계관으로 바꾸는게 아닙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목표는 신약의 신화론적 세계관이라는 헛된 걸림돌을 제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짜 '걸림돌'을 드러내어 현대인이 변명하지 못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비신화화 작업은 정당한 것인가요?
불트만은 이러한 비신화화 작업이 이미 바울이나 요한부터 했던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4. 해석학
앞에서도 말했듯이 기독교는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있는 경전 종교이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해석'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불트만은 성경 독해를 위한 2가지 해석학적 원칙을 세웁니다.
前이해 (pre-understanding)
삶의 연관 (life-relationship)
인간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 질문하는 존재이기에 우리의 삶의 어느 순간을 표현한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구절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상황 혹은 성경이 나를 읽어내는 순간..
이것이 '전이해'입니다. 또한 해석자가 텍스트에 표현된 주제와 '삶의 연관'을 가질 때 비로소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삶의 연관이 없다면? 텍스트는 침묵할 뿐입니다.
불트만이 역사라는 텍스트를 접근하는 방식 역시 이러한 자세에서 비롯되는데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역사에 접근할 때 그때 역사는 정말로 우리에게 말하기 시작한다고 봅니다.
즉 가장 주관적인 '실존의 질문'을 통해 역사라는 텍스트를 만나고
이 텍스트에 담긴 역사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 해석으로 들어간다고요.
불트만에게 주-객이라는 도식적 사고는 거부됩니다.
인간과 신을 제대로 알려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선 안된다고 봅니다.
불트만은 이러한 해석학적 원칙을 성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황'에 대한 질문이 필요한데
'실존철학'이 이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주고 있다고 보았기에 실존철학을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다만 인간의 타락을 이해하는데 있어 실존철학은 인간의 능력을 너무 신뢰하지만 실상은 인간의 타락은
총체적인 것이기에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죄를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함이란 법적인 사면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뜻합니다.
진정한 삶은 자신으로부터 해방될 때만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셨으며
이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이며 인간에게는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5.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만남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세가지 점에서 같은 성격을 지닌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인간의 구원 혹은 인간의 새로운 자기 이해가 목적이고
둘째, 지금 여기에서의 결정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셋째, 이 결단에 의해 인간은 죄나 세상적인 것 추구, 스스로 만든 안정성이라는 참되지 못한 삶에서 자유로와집니다.
다만 불트만은 역사비평학을 신앙과 연계시키는 것은 반대합니다.
역사적 연구는 상대적이고 바뀔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연구에 의해 판단받아서는 안된다고 본 것입니다.
역사적 연구의 타당성은 부인하지 않으나 신앙을 확보하기 위한 객관적 보증은 반대하였습니다.
6. 불트만의 의미와 평가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역사와 신앙'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며 앞으로 후학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역사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실현되는지,
기독교종말사상이 어떻게 현재 역사속에서 의미를 가지는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하나님의 섭리가 보편사와 어떻게 관계하는지..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전근대적 세계관에 쌓인 복음의 본질을 드러나게 하여 지금 우리에게 복음을 의미있게 하려는 작업이며,
해석학의 원칙인 전이해와 삶의 연관은 우리와 성서텍스트간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또한 예수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도래하는지 그 '시간성'이 난제였는데
불트만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요소와 현재적 요소를 '실존적 현재'라는 개념으로 해석했습니다.
다만 불트만은 실존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을 간과하는 면이 있습니다.
개인의 실존이 강조되면서 보편사가 취약해진 것이죠.
하지만 이것 역시 새롭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성과 실천성 역시 각 개인들의 결단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죠.
여전히 이 시대에도 불트만은 빛나는 신학자임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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